Skip to content

복음주의클럽

조회 수 13771 추천 수 2 댓글 0

영화 노아를 보고: 21세기에 노아 말 되게 읽기

 

I. “노아”, 보지 말라고?

영화 노아”(Noah)를 두 번 봤다. 한 번은 개봉하자마자 영어로, 또 한 번은 한인 타운까지 나가서 한글 자막으로. “노아를 보면서 다시금 확신하게 된 것은 세상에는 금해야만 하는 영화는 없다는 거다. 영화가 원작(성경)과 다르다고 그 영화를 금하는 것은 상상력 부족이 감행하는 율법적, 유아적 발상이다. 어느 영화나 그렇듯이 대런 아로노프스키(Darren Aronofsky) 감독이 노아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지 그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할 듯하다. 영화를 처음 보러 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굳이 왜 노아였을까?’ 성경에 노아보다 더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 어 낼 수 있는 인물들이 많을 터인데 스토리가 짧은 노아 이야기를 가지고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궁금해 하며 영화를 봤다. 두 번 보면서 노아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21세기에 노아 말 되게 읽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성스러움에 갇혀 있을 수 있는 성경의 노아를 현대의 언어와 문제의식으로 풀어놓았다고나 할까? 이렇게 노아 이야기를 풀어낸 감독의 고민이 치열했음을 보게 된다.

 

II. 몇 가지 주제들

1. 종교와 과학

이 영화는 몇 가지 주제를 이야기 하는 듯하다. 우선은 종교와 과학 부분이다. 영화는 창세기 11절 말씀(“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에 약간의 변형을 주는 선포로 시작한다.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다.”(“In the beginning, there was nothing.”). 이 표현은 둘 다 신학적 용어로 설명하자면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그 둘에 있어서 뉘앙스는 다르다. 창세기 11절이 창조주 되심을 명시적으로 선포하는 하나님에 대해 강조점을 두었다면, 영화 노아에서의 시작 표현은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은 ”(nothing)에 대해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면에 존재하는 한 분 하나님을 전재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이 표현의 완전한 의미는 태초에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In the beginning, there was nothing without God)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홍수가 난후 방주 안에서 노아가 자녀들에게 이야기 할 때도 작은 불빛을 덮으면서 한 번 더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설명한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창조주 없이는 세계를 설명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래도 기독교는 이 영화를 금해야 하는가? 하나님 없이 세계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과 세계는 동시적 존재가 아니다. 이는 세계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존재할 수 없기에 동시적 존재가 아니라면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그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 누군가는 하나님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화는 철저히 그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한다. 물론 무로부터 창조 이후 감독은 우주 역사와 생명체가 발전하는 진화적 부분을 인정하는 듯하다. 흔히 말하는 유신진화론의 유형이 될 것 같다. 종교와 과학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2. “정의를 행하라.”

또 하나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정의부분이다.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먹은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해 악이 등장하고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을 통해 악이 만연해 진다. 그러나 역사는 아담의 셋째 아들 셋을 통해 후대로 흘러가며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이어지는 계보가 형성된다. 라멕이 뱀 껍질을 자신의 팔에 감으면서 아들 노아에게 한 말은 정의를 행하라.’였다. 그리고는 라멕은 사람들에게 죽고 노아는 그곳을 탈출한다. 영화는 그 정의가 무엇인가를 노아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노아는 꿈과 환상 속에 뱀이 등장하고 물속에 죽어있는 시체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이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꿈을 해석하기 위해 할아버지 므두셀라를 찾아 나선다. 그 길에서 셈의 아내가 될 일라를 만나고 타락한 천사들인 돌로 된 거인 감시자들(watchers)을 만난다. 그들이 노아를 죽이려 하지만 노아에게서 첫 사람 아담을 발견하고는 죽이지 않고 도와주게 된다. 므두셀라를 만나 꿈에서 본 장면을 이야기 할 때 노아는 물에 빠진 동물들이 배로 올라가는 또 다른 환상을 보게 된다. 므두셀라에게서 씨앗 하나를 받아온 노아는 그것을 땅에 심고 세상의 모든 동물들과 자기 가족을 위해 방주를 짓는다. 여기에 뱀도 예외가 아니다. 모든 종자가 들어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류에게 악의 가능성을 가져다주며 유혹했던 뱀 또한 죽음의 대상이 아닌 복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두발가인이 인간은 죽이고 동물은 살리는 것이 말이 되냐는 불평과 이어진다. 저자의 의도 속에 보편 구원의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3. 인간 실존의 다양한 군상들, 그러나 별반 다르지 않은...

영화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삶의 솔직한 모습들을 그린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켜야만 하는 도덕적 의무감과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해야 하는 신앙 사이에 노아의 갈등이 그려진다. 하나님의 명령은 인류의 멸망을 거친 새 창조의 모습이라고 노아는 판단하기에 자손이 대를 이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후손을 번성 시키려 하는 아들들의 반항이 대립된다. 함이 불평한다. ‘새들도 짝이 있는데 나는 짝이 없다. 함은 숲에서 여자들이 지나가는 장면을 보다가 가인의 후예인 두발가인을 만난다. 함과 두발가인이 방주로 와서 노아를 만났을 때 두발가인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 관심이 없고 자신이 왕이기에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 한다. 이 때 감시자들이 노아를 보호하고 두발가인은 일단 후퇴한다.

   

노아가 밤중에 두발가인의 무리들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고기를 먹기 위해 아이들을 파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그리고 죽어가는 백성들의 아픔 속에서 자신 또한 그들과 다를 것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모습을 발견하고 돌아와서는 세상 사람들만 사악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가족도 사악하다 생각한다. 셈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함은 탐욕에, 야벳은 남의 비위를 맞추려 하고, 자신도 아내도 아이들 위해서 무엇이든 하려는 욕망이 있기에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 한다. 그러기에 자기들도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4. 그것이 어떻게 정의인가?

비가 오기 시작하자 두발가인은 하나님에게 따진다. ‘나도 인간인데 왜 나에게는 정의를 이야기 안 하는가?’ 하늘에 포를 쏘며 군중들을 선동한다. ‘우리는 인간이다. 우리가 결정한다. 방주를 점령하라.’ 성난 군중들이 방주로 달리기 시작한다. 함 또한 여자를 데리고 방주로 달려 갈 때 그만 여자는 덫에 걸려 괴로워한다. 뒤에는 성난 백성들이 방주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오고 때마침 함을 찾으러 나온 노아는 덫에 걸린 여자를 그냥 버려두고 함과 함께 방주로 달린다. 어쩌면 자기 가족만 살리려는 이기심을 보여 주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창조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게 노아의 기본 생각이다. 거인 감시자들이 방주를 지키면서 군중들을 죽인다. 노아와 함만 들어간다. (이 장면을 보면서 천국이 저런 모습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의 분노와 슬픔이 극에 달해 있는 그런 곳이 천국일까?)

   

이제 방주 안에 들어와야 할 사람들이 다 들어왔을 때 밖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도와 달라는 절규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다시 출발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은 죽어야 하기에 결국 돕지 않는다. 노아는 자녀들에게 순서대로 가족들의 장례를 담당하라 유언한다. 감독이 이 장면을 통해 보여 주고자 했던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정한 정의와 평화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 아닐까? 죽어가는 자들이 절규하는데 방주 안에서의 평안함이 진정한 평안함인가? 그것이 진정한 정의인가? 이에 함은 그 자리를 뜬다. 그리고 몰래 들어온 두발가인에게 가서 그를 도와주고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다. 함에게서 가룟 유다의 모습이 오버랩 되지 않는가? 예수에게서 실망하고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은 30에 예수를 팔아 버린 가룟 유다의 모습이 데자뷰 된다. 시대를 막론하고 섭섭함은 늘 언제나 복수를 동반하는 법이다.

   

므두셀라의 치유로 불임이었던 일다가 임신을 하게 되고 그 사실을 노아에게 알렸을 때 노아는 대노 한다. 아들이면 살지만 자손을 이을 수 있는 딸이면 죽인다는 거다. ‘내키지는 않지만 정의를 위해서는 창조주를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 노아의 확고한 생각이다. 이에 아내가 분노한다. 그것이 어떻게 정의냐고. 아이를 죽이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고 정의냐고. 노아를 지금까지 따라왔지만 이제는 절대 용서 못한다고 증오한다고. 남편 노아를 용서 못하고 증오하는 것, ‘그것이 정의라고 두 번 반복한다. 그래 그것이 어떻게 정의인가? 사람을 죽이고 인류를 죽이는 것이 어떻게 정의인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정의로 둔갑시켜 버린 것은 아닌가? 어쩌면 그것을 뒤집는 것이 정의 아닌가?

 

5. 정의를 이긴 사랑

일다는 쌍둥이 딸을 출산하고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아이들을 죽이려고 하는데 일다는 노아가 자신에게 불러준 자장가를 우는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그러자 아이들은 잠이 들고 그 평온한 모습에 노아는 아이들을 죽이지 못하고 그들에게 키스하고 칼을 버린다. 노아는 하늘을 향해 못하겠다”(I cannot do this) 한다. 이 부분이 최초로 노아가 하나님에게 행한 반항일 거다. 아니 어쩌면 정의라는 이름하에 하나님을 폭력의 하나님으로 가정했던 노아 자신의 신적 이미지에 대한 반항이자 거부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폭력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홍수에 대해 후회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너희와 연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9:11). 하나님도 스스로 세운 정의를 허물지 않으시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가정을 떠나 홀로 지내며 술로 세월을 보낸다. 함이 노아의 벗은 몸을 보고 길을 떠나고 일라는 노아에게 물어본다. ‘왜 아이들을 살려줬냐고.” 이에 노아는 아이들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온통 사랑 뿐이었다고. 그래 사랑이 정의를 이긴 거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사랑이 거짓 정의를 이긴 거다. 인류가 멸망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겼는데 그리고 그것이 정의라 생각했는데 갓 태어난 아이들을 보면서 온통 마음속에 사랑이 싹튼 것은 사랑이 거짓 정의를 사라지게 했음을 의미한다. 이제 까지 마음속에 정의라고 생각했던 잘못된 개념을 버리게 된 것이다. 버리고 나서 찾은 것은 마음과 생각의 일치 아닐까? 이성과 신앙의 일치 아닐까?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이 간격은 너무나 크다. 신앙은 늘 언제나 이성의 소리를 무시하고 하늘만 바라보려 한다. 어쩌면 늘 그렇게 자아 분열된 모습으로 살아간다. 영화는 노아가 가족들이 번성하고 충만하도록 축복하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III. 더 많은 노아가 상영되기를...

기독교 내에서 이 영화를 보지 말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상당하다고 서두에 이야기했다. 그런데 기독교는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세상에 대응할건가? 성경을 조금만 다르게 해석하는 것에 대해 혈기를 부리는 것은 몸에도 좋지 않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의 영화를 원한다면 아이들이 보는 성경 만화 영화 엄청 많으니 그걸 보면 되시겠다. 그리고 헐리웃 영화가 교회 목사님 설교 말씀과 같기를 바란다면 어디 그게 영화일까? 세상의 모든 책들이, 세상의 모든 가치관이 어느 누구만 해석할 수 있는 독점권이 있는 것이 아니듯이, 성경은 기독교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땅에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자 그 누구든 성경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 질문에 답해야할 의무가 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이야기했듯이 좋은 질문이 있어야 좋은 대답이 나오는 법이다.

   

나는 상업영화가 성경의 모든 인물들을 주제로 더 많은 영화를 만들었으면 한다. 아브라함도, 가룟유다도, 바울도 만들기를 원한다. 영화를 통해 세상이 기독교의 인물들을 알지 않는가? 그리고 기독교인이든 세상 사람들이든 하나님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고 질문하게 하지 않는가? 이것이 복음전도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공지 클럽 라운지 [공지] 새 사이트 가입에 관해 [1] 현철 03.11 63712 1
공지 클럽 라운지 게시판 안내 - 클럽 라운지는 소개하는 곳, 더 스테이지는 논쟁을 벌이는 곳입니다. :) 현철 03.10 58301 5
공지 클럽 라운지 가입 과정의 애로 사항을 알려주세요. [8] 클럽장 03.10 69871 2
62 더 스테이지 프로젝트 <예수님을 팔아 장사하는 분들의 좌판을 엎는 이야기, <쿼바디스>>의 282번째 후원인이 되었습니다. 함께해요! 애드키 09.18 17896 1
61 더 스테이지 프로그램, 이벤트 중독에 빠진 교회 디트라이브 04.08 13264 5
60 더 스테이지 퀴어퍼레이드 이후 동성애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3] YJYJY 06.09 18278 5
59 더 스테이지 콘트롤 타워는 대체 어디로 갔나? [1] file 클럽장 04.23 12950 3
58 더 스테이지 칼빈주의 공부하다가..의문이 듭니다. [2] 프탄의정신 03.25 18715 0
57 더 스테이지 청어람 집담회 "침몰사회,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2014.05.20) file 클럽장 05.13 14701 1
56 더 스테이지 지식인에 글을 올리고 있었던 일 [1] 국찐이빵 08.11 18421 0
55 더 스테이지 제주 4.3사건, 서북청년단...그리고 한경직 file 디트라이브 04.03 58159 6
54 더 스테이지 정치에 관심 있는 복클러 분들께 비공개 베타 테스트를 부탁드립니다. [9] 애드키 04.07 16285 3
53 더 스테이지 잠시 한국에 들어와 계신 선교사님들 자동차 종합보험으로 가입하세요. [2] 육바금지 03.14 8220 1
52 더 스테이지 일베 전성시대가 끝나가고 있답니다. [3] 클럽장 01.12 12530 8
51 더 스테이지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 cer 08.19 16425 1
50 더 스테이지 우리의 공동체에는 음식의 독을 찾아내는 감별사가 필요한가요? 길버트 03.28 12230 3
49 더 스테이지 왜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나요? [1] 배정모 03.22 9243 0
» 더 스테이지 영화 “노아”를 보고: 21세기에 노아 말 되게 읽기 tearpark 04.04 13771 2
47 더 스테이지 영화 '쿼바디스' 전국 시사회를 만들어 봅시다 [1] 클럽장 08.10 17113 1
46 더 스테이지 영화 '쿼바디스' 전국 시사회 열렸습니다. file 클럽장 10.12 16868 2
45 더 스테이지 여러분의 2014년은 어땠습니까? 클럽장 12.09 13944 0
44 더 스테이지 여객선 침몰 관심을 바라보는 나의 입장 일상맨 04.24 8994 -2
43 더 스테이지 안부 전화, 남성분들 의견이 궁금합니다 [4] 푸른너 06.12 13635 2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4 Next ›
/ 4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Copyright ⓒ 2014 복클. All rights reserved.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