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복음주의클럽

조회 수 3795 추천 수 2 댓글 8

복음과 상황 2009년 11월호


과학과 종교를 넘어선, 세상을 위한 변증


지적설계연구회 조민수


과학과 신앙은 충돌하는가? 과학과 신앙 간의 충돌은 근대 과학의 핵심에 결정론과 기계론적 환원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부각되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오히려 과학은 기독교적 배경과 그 지원 아래서 적극적으로 탐구되고 발전했다. 그래서 근대 물리학의 선구자였던 과학자 뉴턴은 창조의 질서와 조화를 연구하는 신학자 뉴턴이기도 했다. 이 시대에 과학과 종교 간의 충돌과 조화에 관한 물음은 ‘당신이 생각하는 과학’이란 무엇이며, ‘당신이 생각하는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물음을 필연적으로 끌어들인다. 만약 당신이 서점에서 과학 코너를 자주 찾는 사람이라면 아마 오래 전부터 이 질문을 되묻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과학 담론의 장에서 탁월한 저술가들이 종교를 그릇된 미신으로 몰아세우며 자신들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공공연히 설파하는 것을 오랫동안 봐왔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손에 하나같이 다윈의 진화론이 쥐어져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무신론 논변의 단골 메뉴에 진화론이 빠지는 일이 결코 없다. 다시 말해 이 시대 과학과 신앙 간의 스캔들의 핵심에는 진화론이 놓여있는 셈이다. 

사실, 신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은 진화 개념과 충돌하지 않는다. 신은 창조계를 연속적인 창조 과정을 통해 만들 수 있다. 어거스틴은 창조를 논하면서 씨앗을 만들고 그것을 적절한 때에 자라나게 하는 것에 비유했다. 페일리의 시계공 논증을 떠올려 보자. 그 시계공 또한 조그만 몇 개의 톱니바퀴로부터 시작해서 한동안 심혈을 기울여 점차적으로 시계를 조립해 나갔을 것이다. 이처럼, 창조 또한 단계적이고 연속적인 과정을 밟을 수 있다는 추측은 자연스럽다. 만약, 당신이 ‘진화’라는 개념을 ‘시간에 따른 유기체의 변화’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창세기를 해석하는 데 어느 정도의 유연성을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진화’는 기독교와 충돌하지 않는다. 신은 이 세계를 창조하고, 또한 그의 계획과 인도에 따라 창조계를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진화에 관한 이러한 유신론적 이해는, 이미 전통적 기독교 내에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해 왔다. 따라서 사실 ‘창조’와 ‘진화’라는 개념의 이분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기본적으로 창조와 진화라는 두 개념은 그 의미의 층위가 다르다. 어떤 면에서, 이 둘은 사실상 같을 수도 있다. 진화에 관한 유신론적 이해는 충분히 가능한 영역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간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은 편협한 극단주의자들의 과오로 이해하면 그만일까? 문제는, 이것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최근 들어 진화론 수용을 주장하는 이들은 창조-진화 논쟁의 핵심을 단순히 ‘성서 문자주의’로 몰아가며, 다윈주의 진화론에 비판을 제기하는 이들을 근본주의자들로 몰아세우는 경향이 강하다. 만약, 진정 그것이 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우리가 이 시대 과학적 무신론에 대응하는 변증에 나서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창조과학류의 성서 해석을 벗어나서 해석학적 유연성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진화론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존의 신학과 그리 쉽게 어울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제 ‘논의의 대상이 되는 특정한 진화론이 우리의 유신론적 이해와 양립할 수 있는 이론인가’로 논의의 초점이 옮겨져야 한다. 기독교 변증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이론으로서의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은 ‘신은 진화의 방법을 사용해서 창조했다’는 레토릭으로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현재 과학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다윈주의 진화론의 구체적인 내용이 신의 섭리에 관한 과학적 서술로 이해하고 포괄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적자생존’을 따르는 다윈주의 진화론과 기독교 윤리의 문제

전통적으로 진화 또는 연속 창조에 관한 교회의 견해는,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신의 설계와 목적에 의해 ‘인도된 진화(guided evolution)’라는 개념에 해당되었다. 하지만 유기체의 진화에 관한 현재의 주류 과학 이론인 다윈주의 진화론은 ‘인도된 진화(guided evolution)’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 개념을 주장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다윈의 진화 모델에서는 유기체의 재생산에 관여하는 임의의 변이, 즉 일종의 복제 오류와 제한된 환경에서의 생존 경쟁이 진화의 동력이 된다. 이 다윈주의의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르는 진화는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들의 잔혹한 약육강식 속에서 적응하지 못한 자의 도태를 통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과정은 인도된 진화에 대응될 만한 비자연적인 개입을 배제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적자생존으로서의 진화를 창조 과정으로서 활용하는 창조자의 모습이, 신의 본성에 관한 기독교의 입장과도 부합하지 않고 약자에 대한 희생적 사랑을 가르치는 기독교 윤리와도 상치한다는 것이다. 다윈주의 모델은 심리학, 인류학, 경제학으로 확장되어 나가면서, 의미의 상층부를 모두 환경 변화에 적응한 경쟁의 산물로 치환시기는 환원주의적 자연주의를 강하게 보여준다. 에드워드 윌슨의 책 <통섭>, 리처드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 등은 다윈주의 모델이 얼마나 포괄적이고 철학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다윈주의 진화론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경쟁의 신화’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아주 강력한 종교적, 사회적 함축을 가진 이론인 것이다.

따라서, '다윈주의 진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진화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유신론적 입장을 갖는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일차적으로, 신의 섭리를 ‘비인도된(unguided) 자연적 과정으로서의 진화’와 양립시켜야 한다. 또, 창조 과정이 신의 계획과 구상 그리고 예견에서부터 자율성을 획득한 자연적 과정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현재의 유신 진화론자들이 이러한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에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예를 들어, 생물학자이자 유신진화론자인 케네스 밀러(Kenneth Miller)는 진화 과정을 무작위적 자연 과정으로 이해해야 하며 따라서 인간의 형태는 신에 의해 미리 예정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바티칸 천문학자이자 유신 진화론자인이자 조지 코인(George Coyne)에 따르면, 신은 인간의 탄생에 관해서 확실히 알지 못했다. 로버트 존 러셀(Robert John Russel)은 신은 우리가 탐지할 수 없는 양자 역학의 불확정적 우연을 통해 활동한다고 주장한다. 존 호트, 낸시 머피의 저작들에서 나타나는 케노시스 신학은 강권적인 능력의 개입을 억제하고 피조물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신의 자기희생이 자율적인 다윈주의 진화 과정과 부합하는 것이라고 옹호한다. 현재 상당수의 유신 진화론자들이 과정 철학의 틀에서 ‘전지전능’이라는 전통적인 신개념을 수정하기를 주장하거나 신의 능력 제한과 억제를 강조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다윈주의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창세기 기사의 해석 문제를 넘어서서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온 신의 본성과 능력에 관한 수정으로 향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모색되고 있는 유신론적 진화론이 결과적으로 어떤 신학적 입장으로 수렴되어 나타날지 좀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겠지만, 다윈주의 진화론의 신학적 수용이라는 이 기획은 그 자체가 바로 논의의 한계가 되어버리는 위험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과학과 신앙의 충돌을 넘어 화해와 조화를 향하자는 제언들 속에서 무엇이 신앙의 지표이고, 무엇이 과학의 지표로 논해지고 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라. 만약, 그들이 말하는 신앙이 창세기의 문자적 고수라면, 당신은 과학을 무리하게 신앙에 맞추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학문적 성실성과 비판의 합리성보다 창세기의 기사들의 문자적 입증이 그 주요 관건이 될 것이다. 반대로 만약 그들이 말하는 과학의 기준과 핵심에 ‘다윈주의 진화론’이 자리 잡고 있다면, 당신은 신앙을 이에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다윈주의를 비판하는 견해는 ‘갈등 이론’ 또는 ‘대립 이론’으로 분류된다. 이런 기준들에 의하면, 과학과 신앙의 갈등을 조장하기 위해서 굳이 당신은 창조 과학의 6일 창조를 주장할 필요도 없다. 다윈주의 진화론에 비판적인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우리는 주류 과학이나 특정 신학 어느 한쪽의 틀에 나머지를 끼워 맞추려 드는 입장들로부터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창조와 진화의 이분법에 얽매여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고수하는 ‘젊은 지구론’을 옹호하지만, 최근 들어 기독교를 더 좋은 변증적 입장에 놓고자 다윈주의 진화론을 수용하는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이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과학적 무신론 시대의 변증을 위해서는 두 흐름을 넘어서는 ‘인도된 진화’에 관한 다양한 변증학적 시도들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성서 문자주의와 다윈주의 진화론 양자 모두를 넘어서서, 다양한 형태의 비환원주의적인 과학 이론들을 모색하고 과학과 신학의 다리를 놓는 대안적인 입장을 탐구해 나가는 것이다. 특히, 기존의 전통적인 기독교 유신론이 이해해 온 것처럼, 신의 계획과 예정,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포괄적으로 허용하는 ‘인도된 진화’를 변증하려고 한다면, 다윈주의 진화론에 관한 대안으로서 ‘지적 설계론’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설계 추론을 현대적으로 재정립하면서 다윈주의 진화론의 비판적 대안을 추구하고 있는 지적 설계론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유신론이 이해해 왔던 ‘설계된 창조계’, 또는 ‘인도된 진화’를 지지해주는 과학 이론이 됨과 동시에, 다윈주의 진화론이 가진 핵심 문제점들에 관한 학술적인 비판들을 제공해 준다. 무엇보다, 지적 설계론은 현대 과학이 지닌 철학적 성격과 그 한계를 규명한다는 면에서 기독교라는 종교와 창세기라는 텍스트를 넘어서 있다. 현재의 자연주의적 과학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공통의 연구 프로그램들을 제안하고 이를 통해 세계의 독특성과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회복을 시도하는 이들의 전략은, 과학적 무신론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새로운 변증적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신앙인으로 과학 시대 살아가기

나는 과학적 무신론 시대의 새로운 변증을 고민하는 기독교인들이라면, 과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마이클 폴라니(Micheal Polanyi)의 변혁적 비전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로서 20세기 전반부를 살아가며 과학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목격했던 그는, 시대의 진보를 이끌어 온 과학의 힘만큼이나, 인류 정신에 깃든 자기 파괴적인 힘 또한 과학관의 문제점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계승되어야 할 형이상학적 지식, 도덕적 원리, 선악 관념들이 잘못된 과학관에 의해 해체되고 비하되고 있다고 우려했던 그는, 기계론적 환원주의와 유물론적 자연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인 이론과 과학적 지식론을 정립하는 것에 헌신했다. 1967년 <화학과 공학 뉴스>에 실었던 ‘생명 현상은 물리학과 화학을 넘어선다’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이미 그는 하위 차원으로 환원 불가능한 구조를 지닌 유기체들의 구조에 관한 선구적인 통찰을 보여주었으며, 기포드 강연을 정리한 그의 탁월한 주저 <개인적 지식>에서는 인격적 관여와 책임을 주장하는 대안적 지식론을 내세우면서, 다윈주의 진화론에 관한 비판 또한 잊지 않았다. 그는 보편적 지식으로서의 과학의 성립 가능성을 낙관하면서도 과학 연구가 가질 수밖에 없는 주관적 특성과 철학적 특성을 간파했기에, 과학 이론이 지니는 한계와 그 비판에도 적극적일 수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이 과학적 무신론 시대에서 우리의 관심이 단지 기독교를 위한 변증이라면, 우리 나름의 게토화된 과학을 만들거나, 상보론적 입장이라는 손쉬운 격리보호 전략을 추구하거나, 또는 주류 과학의 논리에 우리의 신학을 적응시키는 방식으로 한동안은 만족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폴라니와 같이 우리가 ‘세상을 위한 변증’을 펼치고자 한다면, 종교적인 수사들은 내려놓고 과학 담론들에 비판적으로 뛰어드는 시도들이 늘어나야 한다. 선교를 위한 성경의 입증과 전도 효과만을 강조하거나, 과학과 평화를 위한다는 일념 아래 변혁을 위한 갈등조차 감수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는 기독교를 위한 변증일 뿐 이 세상을 위한 변증이 될 수 없다. 만약 정말 기독교의 진리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얻은 계시의 단편들이 과학과 관련한 문제와 그 탐구에 있어서도 이 세계 모두를 위한 조그만 빛이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과학을 포함한 우리 삶의 모든 영역들을 연결하여, 흩어지고 조각난 소중한 목적과 의미들을 통찰할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그것이 신앙인으로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희망이자 소명이며 기쁨이다. 

?Who's 파스칼

profile

글을 길게 써서 미안합니다.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요. - Blaise Pascal 




  • profile
    파스칼 2014.03.11 18:10
    복음주의권에서 창조-진화 논쟁을 살펴볼 때, 특히 유신진화와 관련하여서는 여전히 참고가 될만한 글이라 필자의 동의하에 퍼옵니다.
  • profile
    ooduboy 2014.03.12 01:50
    공명정대한 필자로군요.ㅎㅎ
  • profile
    파스칼 2014.03.12 09:28
    저도 이 필자 참 좋아합니다.
  • profile
    이인용 2014.03.13 01:55
    잘 읽었습니다.
  • ?
    임화섭 2014.04.07 05:32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그닥... 창조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든, 지적설계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든 (두 가지가 과연 다른 것인지도 심히 의문이지만) 합리주의적 경험과학의 기본적 사고방식과 전제 자체가 맞질 않아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조화는 안 될 겁니다. 억지로 봉합하고 건드리지 않는 것 정도가 기껏해야 최선이죠. 창조론 진영과 지적설계론 진영은 (서로 아무리 서로 다르다고 주장해 본들) 이미 지적 게토의 똑같은 구역에 함께 몰아넣어진 상태입니다.
  • profile
    파스칼 2014.04.07 08:15

    "합리주의적 경험과학의 기본적 사고방식의 전제"(?)가 뭔라고 생각하시는지요?

  • profile
    cer 2014.04.07 09:19
    웹사이트가 미덥지 않긴 합니다만 John Polkinghorne이 아래와 같이 얘기했었나 보지요? 이 분이 ID를 너무 단순하게 이해했는지....
    (http://www.starcourse.org/jcp/qanda.html)

    Q: What about intelligent design? Has John's thinking evolved from such thinking or is his thinking different all together?

    Preliminary Response: The basic problem with ID is that God is never spoken of as a “designer” in the Bible: He is Creator and Father and a Father does not “design” his children. It seems that Evolution is one of the principles, like Gravity, which God has used to create the Universe: there is no more a conflict between Evolution and Creation than between Gravity and Creation.

    John adds: ID also makes a scientific claim of identifying molecular biological systems of irreducible complexity, but I do not believe it has made its case. It is not enough to consider a single system in isolation, since evolution works in an improvisatory way, coopting what has been useful for one purpose to help achieve another. ID also seems tacitly to make the theological mistake that God, who is the creator and sustainer of nature, would not be content to work through natural processes, which are as much expressions of the divine will as anything else.
  • profile
    파스칼 2014.04.07 11:58

    폴킹혼은 유신진화론자에 가깝지만, 사실 설계론(ID)에도 어느 정도 열려있고 다윈주의 진화론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다소 독특한 인물입니다. 과학과 신학을 논하는데 있어서 그는 빼놓을 수 없는 학자이고, 그의 통찰력있는 글들은 언제나 흥미롭기에 저도 좋아합니다. 그는 현대 설계론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줬죠.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은, 폴킹혼은 자신의 입장과 설계론의 유사성에 관해서 그리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겁니다. 이 글도 마찬가지 입니다. 신이 법칙을 통해 일 할 수 있는데 설계론이 이를 거부한다는 건 사실이 아닙니다. 설계론자들도 그 부분에 있어서 폴킹혼과 생각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설계론자들의 주장은 이 웹페이지에 나오는 폴킹혼의 다음 주장과 거의 일맥상통합니다.

    John (Polkinghorne) uses the phrase “active information” and points out that modern science strongly suggests that the behaviour of complex systems is under-determined by normal physical laws. ... the processes of evolution (in the broadest sense) have a role in intermediating between “active information” and “physical stuff”


    그가 말하는 active information은 설계론자들이 말하는 설계와 개념적으로 아주 유사합니다. 참 묘한 아이러니죠.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5 창조와 진화 논쟁, 그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하여 [13] 파스칼 03.03 3021 10
14 창조와 진화 관련한 추천/참고도서 목록을 한번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8] 현철 03.17 4939 4
13 과학과 창세기 해석 - 폴킹혼, 맥그라스, 라이트 인터뷰 [1] cer 04.12 4775 4
12 창조론과 진화론, 변증의 계절이 다시 오고 있다 - 양희송 [6] 파스칼 03.11 6486 3
11 전능한 신이 ‘불량품’을 만들었을까 - 오강남 파스칼 04.02 2724 2
» 과학과 종교를 넘어선, 세상을 위한 변증 - 조민수 [8] 파스칼 03.11 3795 2
9 자연은 우리를 과정신학이나 열린신론으로 이끌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44] ooduboy 03.12 5296 1
8 재미있는 동영상 하나 보고가세요. [26] 개패는청년 03.11 5156 1
7 진화 논쟁 추천 도서 목록 [3] 파스칼 08.16 9815 1
6 설계자의 설계자는 누구인가. [4] penguin 11.10 5245 0
5 송인규 교수, '유신진화론자들 치졸해' ? [19] 파스칼 03.31 8069 0
4 진화적 창조론 혹은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비판 [5] 토머스 03.30 4480 0
3 빅뱅 직후 우주 급팽창에 대한 직접 증거 최초 발견 [8] cer 03.18 4686 0
2 BICEP2, 다중우주, 설계자, Gliese 581g, 외계인, 그리고 예수를 통한 구원 [4] cer 04.21 7460 0
1 창조 진화 관련 볼만한 책들입니다. [2] file 변군 05.14 4365 0
Board Pagination ‹ Prev 1 Next ›
/ 1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Copyright ⓒ 2014 복클. All rights reserved.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